베트남·캄보디아(2001)

[베트남]역사

제로미의 2005. 3. 6. 20:01

   베트남 역사

                                  

                    .....그 나라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


 

고대국가 (B.C.690~ B.C.111)

海神 락롱권(Lac Long Quan)과 아름다운 山神 어우꺼(Au Go)의 결합으로 100여명의 아들들이 탄생하였는데 이중 훙(Hung)家가 반랑국을 건설(BC 690)하였고 후에 어우락국이 성립되었다. 반랑국, 어우락국, 남비엣국(BC 207) 등이 건국되었다가 BC111년 한 무제에 의해 정복당하여 중국의 지배가 시작된다.

 

중국의 지배(B.C.111-A.D.972)

중국 한족은 어우락국을 패망시켰다. 한무제는 현재 베트남의 북부를 차오치(Chiao Chih)로 명명하고 중국 행정구역의 하나로 편입하여 이 지역에 7개의 君을 설치했다. 이후 쯩(Trung)氏 자매의 저항을 비롯한 몇차례의 저항운동에도 불구하고 972년 베트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중국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중앙집권적 정치에 반기를 들어 봉기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실패하였다. 중국의 지배는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오히려 민족의식을 싹 틔우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베트남은 중국으로부터 불교, 유교, 도교 사상을 전파 받게 되었다.

 

베트남의 독립. 리(Ly)왕조(972-1225)

응오퀴엔 장군이 南漢군을 격파하고 응오(Ngo)왕조를 수립, 사상 첫 독립왕조가 되었다. 그 후 딘(Dihn)왕조와 레(Le)  왕조의 집권 후 1010년 리(Ly)왕조가 출현한다. 리왕조는 국호를 다이비엔(Dai Vien)으로 정하고 자주통치를 확고히 하여, 조세 체제가 정비되고 농업이 육성되는 되었다. 하노이에 베트남 최초의 대학 반미에우(Van Vieu)가 생겨 유교교육제도로 관리를 뽑기도 하였다.

 

레(Le)왕조 시대 (1427-1764)

리 왕조 이후, 쩐 왕조, 명나라 지배를 거쳐 10년간 명과 싸워 승리한 레러이(Le Loi)와 응우엔짜이(Nguyen Trai)에 의해 레(Le)왕조가 세워졌다. 레 왕조는 명을 물리치고, 중부 참파왕국을 무찔러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 독자적인 베트남 문화를 창달했던 베트남 역사의 황금시대였다.

 

레 왕조의 쇠퇴와 응우엔(Nguyen) 왕조(1765-1945)

17세기 레 왕조의 쇠퇴로 북의 찐(Tring)과 남의 응우엔(Nuyen)으로 분열되었고 약 50년에 걸쳐 남북조간의 항쟁이 계속되었다.

 

남의 응우엔(院)왕조는 챰파를 정복하고 남하했다. 납북조의 대립은 18세기 들어 중부에서 발생한 농민봉기로 쌍방 모두 멸망했고 농민 봉기 지도자가 떠이 선(Tay Son) 왕조를 세우고 청의 침략군 20만명을 하노이에서 대파했다.

 

떠이선의 반란으로 남부 으우엔이 몰살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응우엔안(Nguyen Anh)왕자는 프랑스 상인의 도움으로 무기와 자금을 지원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1801년 남부와 중부에서 떠이선 군을 물리치고 다음해는 북부지역까지 완전히 점령하게 되었다. 수도를 훼(Hue)로 옮기고 유교를 숭상하고 프랑스 상인들에게 상업 이권을 양도하게 되었다. 아들 민망(Minh Mang)황제는 더욱더 유교를 숭상하여 베트남은 중국사상과 전통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버지가 외국인에게 양도한 이권을 다시 빼앗고 외국인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탄압은 티에우찌(Thieu Tri) 황제 때 극에 달해 많은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하고 추방하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1874년 군대를 파견, 다낭을 점령하고 이후 사이공, 메콩델타를 차례로 집어 삼키게 되었다.

 

프랑스령 식민시대(1859-1954)

1858년 프랑스의 무력 침공으로 남부지역부터 하노이, 후에 순으로 점진적으로 프랑스의 지배에 들어 가게 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영토를 안남, 통킹, 코친차이나 3부로 분할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1833년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연방을 창설하여 하노이에 총독부를 두고 통치하였으며 1899년 라오스도 합병하여 2차대전 말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통치하였다.

 

프랑스는 쌀, 고무 등을 베트남으로부터 착취해 갔고, 메콩델타지역을 개간하게 하여 생산된 쌀을 대부분 유럽으로 수출하였다. 주류, 소금 등을 제조하는 전매회사를 세워 베트남인들에게 강매를 하는 등, 베트남인들은 세금부담과 악화된 노동조건에 시달렸으며, 그에 저항하는 반란군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

 

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한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동맹회'을 결성해 수뇌가 되어, 동맹국과의 협조하에 프랑스, 일본과 항쟁하여 일본의 패망으로 연합국 정상들은 포츠담회담에서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할, 북쪽은 중국군, 남쪽은 영국군이 주둔하도록 합의했다. 이에 베트남은 중국군이 진주하기 전, 1945년 8월 전국적인 총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1945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주둔프랑스군의 무장을 해제하여 약 80년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통치는 끝났으나 대전 후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복귀를 시도, 일본군대 무장해제의 명목으로 남부에 파견된 영국군대의 협조아래 군사적으로 재개입하였다.

 

한편 1946년 3월과 9월에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는 2번이나 잠정협정을 체결하여 한때 '프랑스연합내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성한 국가'로 인정되었으나 실질적 독립을 추구한 베트남과 연방내 자치국으로 한정 인정한 프랑스측이 대립, 하노이에서 무력충돌에 이어 1946년 12월 전면전으로 발전하여 호치민 정권은 지방으로 철수하였다.

 

1949년 프랑스는 제2차 대전 후 퇴위 망명한 응우엔 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와 교섭, 그를 수뇌로 한 '베트남국'을 수립했으나 베트남인민과 군사력은 프랑스군에 대한 전국적인 공세를 펴 결국 1954년 5월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를 이겨 프랑스를 인도차이나에서 철수시켰다.

 

대미항쟁 독립투쟁(1954-1975)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2년 후 총선에 대비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화 세력을 확대하여 정권확보 기반을 마련했고 한편 남부 베트남에는 1955년 바오다이 퇴위 후 카톨릭주의자이며 반공주의자인 고딘 지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어 강력한 반공정책 및 통일거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제네바협정은 1955년 남북대표가 1956년 총선의 실시를 위해 협의토록 하였으나 미국과 고딘 지엠 정권의 통일거부 주장으로 총선은 실시되지 않았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프랑스를 대리하여 베트남 간여를 확대시키는 가운데, 불교도 및 애국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지엠-반미 운동과 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1958년 남부 공산지도자들이 북부 중앙당의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 마침내 1959년 5월 당 중앙 위원회는 남부에서의 무장투쟁을 결의하였고, 1960년에는 공산주의자 및 반정부 지식인으로 구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되어 정부전복 활동을 강화하였다.

 

지엠정권은 그 부패와 독재, 시위대에 대한 정부군의 발포 등으로 국민적 반감이 커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의 전쟁기반이 약해졌고, 이에 미국은 군사쿠데타를 지원, 1963년 격렬한 반정부운동과 함께 지엠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고 그 후 계속된 쿠데타 등으로 정정이 극도로 혼란해지고 전황도 악화되어 미국은 1965년 본격적인 북폭과 남베트남에 전투부대 투입을 개시하였으며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해방전선'과의 전투도 격화되었다. 1968년 해방전선의 구정공세로 파리회담이 개시되었다.

 

북폭은 1965년부터 1968년 11월까지 계속되어 그 후 파리회담을 앞두고 잠시 중단되었으나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2차 북폭이 12일간 주야로 계속되어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5배 분량의 폭탄 10만톤이 투하되었다. 이러한 전투 중에서도 베트남 민주공화국정부, 민족해방전선, 미국 그리고 사이공 정권 사이에 종전을 위한 평화회담이 진행되었고 1973년 1월 27일자로 조인된 파리협정에 의해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협정 후 60일내 철수합의에 따라 미국은 철수하였으나 협정실행을 둘러싸고 전쟁이 계속된 가운데 해방 군사력은 전국적 지원으로 1975년 총공세를 취해 4월 30일 전쟁을 종료하였다.

 

베트남 통일시대(1976-1979)

전쟁 종식 후 베트남은 총선거를 치루어 1976년 7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 선포하였다. 통일 베트남은 외국원조의 단절, 낙후성, 전쟁 후유증, 미국 등의 서방의 제재 및 봉쇄정책, 이웃 강대국과의 관계 악화, 캄보디아 크메르 정권의 침공 등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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