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8일(토)...10일차....하얀 집이란 의미를 지닌 Casablanca
아실라에서 카사블랑카는 야간열차를 예약했었다. 그러나 기차는 연착되고 있다. 라마단 기간이 거의 끝나가서 그런지 저녁마다 거리에는 행사가 있는거 같다. Fes에서는 고운 옷을 입은 아이들을 봤는데 라마단 기간 끝날때라 그렇게 한다고 한다. 1등석 침대칸을 예약했는데 기차가 오자 일단 올라 탔다. 탄 곳은 2등석. 짐을 가지고 가는데 칸을 찾을 수가 없다. 알고 보니 2등석과 1등석은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내려서 다시 타야 했다. 짐을 들고 낑낑~ 겨우 탑승하고 자리를 잡았다.
침대는 Room안에 침대가 4개 있다. 우리 일행은 4명이니까...좋다~
모로코의 가장 큰 도시인 카사블랑카에는 긴 역사가 담겨 있다. 16세기에 포르투칼 식민지가 되었으며(1755년까지) 프랑스 보호령의 총독이던 라우티가 카사블랑카에 넓은 대로와 공공 공원, 인상적인 Mauresqur도시 건물(프랑스 식민지 스타일과 전통적인 모로코 스타일이 혼합된 양식)들을 지으면서 부흥기를 맞기 시작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중의 하나이다. 카사블랑카에 도착하니 5시 50분이다. Casa Voyageus역에 도착하여 우리의 숙소로 가기 위해 물어보니 다들 택시 타고 가라고 한다. 관광객은 무조건 택시로 유도하는거 같다. 흥정을 하고 숙소로 이동~
다행히 우리의 럭셔리한 숙소 Novotel에서 아침 일찍 왔는데도 체크인을 해 준다. 야간열차의 여독을 호텔에서 풀고 바로 나왔다. Hassan II Mosque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이다. 거리는 한산하다.
저 멀리 하산 2세 모스크가 보인다.
1986년 모로코 왕 하산 2세는 카사블랑카에 새로운 사원을 짓도록 주문했다. 그는 1989년 자신의 60번째 생일에 완공될 수 있기를 원했지만, 수많은 일꾼들이 밤낮으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에 이르러서야 문을 열 수 있었다. 이 사원은 신의 왕좌가 물 위에 지어졌다고 하는 코란의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건축가 미셀 펭소(1924~1999년)는 왕의 요구에 따라 일부만을 절벽에 기대어 세우고 대부분이 대서양으로 확장되어 바다 위에 떠 있는 사원을 만들어냈다. 하산 2세 사원의 거대한 복합 건축물은 9헥타르의 면적에 펼쳐져 있고, 그 안에는 이슬람 학교, 여러 개의 공중목욕탕, 모로코 역사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주차장이 들어섰다. 성전은 1만여 명의 신도들을, 그리고 정원은 8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사원 바닥의 일부는 유리로 만들어져, 신도들이 바다 위에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바닥의 난방, 자동문, 자동 슬라이딩 지붕 등 하이테크 기술이 동원되었으며 미나렛에서는 레이저가 메카를 향해 쏘여진다. 6천 명이 넘는 장인과 예술가들의 손으로 놀라운 모자이크와 칼리그래프, 대리석 바닥과 기둥, 회반죽 몰딩, 나무 조각 천장 등이 실내를 장식한다. 메카의 사원 이후로, 이것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큰 회교사원이 되었다. 높이가 2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미나렛 역시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종교 건축물로 기록된다.
"나는 물 위의 사원을 갖고 싶다. 그 이유는 신의 왕좌가 물 위에 있기 때문이다."
J. 카터 브라운, 프리츠커 상 심사위원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모스크는 대서양..바다에 접해 있다.
하산 2세는 1961~1999년 모로코를 통치했던 전 국왕이다
1929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던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에서 모하메드 5세의 장남으로 태어난 하산 2세는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모로코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1953년부터 2년간의 혼란기에는 부친을 따라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다.
56년 부친이 왕좌에 복귀하면서 왕세자가 된 그는 61년 부친의 사망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집권 초기에는 좌익과 아랍민족주의자들의 도전으로 정정이 불안해 6개월 이상 왕위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부친의 정책을 폐기하고 우익 민족주의에 입각해 자신의 정치기반을 구축하는 등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72년 암살미수 사건과 민중봉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73년 키신저의 방문을 계기로 반식민.반제국주의 운동의 선봉에서 친미 지도자로 변신했다.
미국의 대 중동 교두보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정치적 후원을 얻은 것. 이후 그는 중동평화 조정자로 변신, 77년에는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협정을 중재했고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요르단간 화해에도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70년대 민중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모로코 서부에 위치한 스페인령 사하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정정의 안정을 꾀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70년대와 80년대 민중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정적을 감시하는 억제책을 사용했지만 그 대가로 모로코는 북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국가가 됐다.
세계 최장수 국가수반 중 하나로 38년간 재위한 그는 정치안정을 토대로 1998년에는 최대 정적을 총리로 임명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정치를 펴왔다.
1999년 사망했으며, 아들 모하메드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겉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하지만 가이드 투어를 위해 도착하자마자 왔다. 라마단 기간이라 투어시간이 빨리 끝난다. 우리 다른 일행들은 오후에 도착하여 투어를 못했다고 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11시가 끝인데 우린 10시 투어가 가능했다. 티켓을 사서 가슴에 스티커를 붙이고 가이드를 기다렸다. 영어 가이드 투어 줄에 서 있었다. 가기 전에 신발을 담을 비닐을 미리 받아야 한다.
내부는 웅장하고 조각이 아름답다. 모스크 위 지붕이 열렸다.
모스크를 나와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문을 연 식당이 없다. 물어봐도 없다는 대답 뿐. 우리는 같이 다니던 일행이 모로코몰에서 식사도 하고, 구경도 했다길레 모로코몰로 가기로 했다. 걸어가다 물어 보니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고 한다. 포기하고 택시를 타기로 했는데 4명이라 택시 하나로는 되지 않는데 같이 타면 두대 택시값을 내라는걸 거부하고 각자 타고 갔는데 내가 탄 택시는 미터기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이 나왔다. 돈이 모자라 중간에(거의 다 왔지만) 내려 달라고 했다. 택시 바가지는 교묘하다.
모로코몰에 와도 식당이 문을 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먹기는 했지만....
모로코몰은 쇼핑가이다. 빈부의 격차를 느낄 수 있는 곳!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에 호텔을 나섰다. 저녁도 먹을겸...라마단 기간의 저녁시간은 사람이 없다 거리도 한산하고 차도 한대도 안다닌다. 우리만 돌아 다니는거 같다.
식당을 겨우 찾아서 저녁을 먹고, 하이야트 호텔에 가기로 했다. 카사블랑카 영화에 나오는 카페가 있다고 하여 찾아 갔는데 리모델링으로 없어졌다는 답변만 들었다. 영화는 카사블랑카에서 찍지 않았다고 하는데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도시! 저녁시간이 끝나고 나니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거 같다. 컴컴한 곳에서 장사도 하고, 오며 가는 사람들 속을 뚫고 숙소로 돌아 왔다. 오늘 밤만 지나면 모로코와 이별해야 한다.
모로코 여행의 끝자락! 한여름 라마단에 선택한 나라. 매연과 택시 바가지, 길거리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 영어 단어로 의사소통이 힘든 나라, 관광객이 봉인듯한 나라를 잘도 다녔다. 가장 힘들었던 마라캐쉬가 지나고 보니 제일 기억이 남을 듯 하다. 힘든 기억도 지나고 나면 좋은 기억만 남을테지만 이제 모로코와의 작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잠자고 일어나면 대한민국을 향해 렛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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