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어키]역사
터어키의 역사
- 사실 앞에서 간단한 약사를 살펴보긴 했으나, 이 나라의 역사는 땅 중심으로 볼 것인가, 민족을
중심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땅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야만 터이키라는 나라에 가서 존재하는 유적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에...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가장 오래된 인류의 자취는 BC 100,000년대의 고대 구석기 시대의 것이다. 현재도 몇 개의 주요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는 발굴에서는 BC 8,000년 경에 정착했던 인류가 사용했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차요뉴
(기원전 7,250~6,750)와 하즈라르 (기원전 7,040)는 아세라믹시대에 만들어진 곳이다. 지금까지 12개 층까지 발굴된
차탈회육 (기원전 6,500~5,650)은 가장 뛰어난 선사시대의 문화를 보여 주고 있으며 (약 5천명에서 만명의 인구를 가졌음) 역사에서
기록된 것 중에서 가장 조직적인 도시체계를 갖추었다. 기원전 5,500년 경 트로이에 처음 정착했던 잔하산 부족부터 기원전
3,000년까지 아나톨리아는 도시문화에 있어서 특별한 진전이 없는 암흑시대였다. 초기 청동기시대는 아나톨리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기원전 3,000년 후반기에 소아시아 전역에 존재했던 하틱 문화가 청동기 문명을 대표한다.
하틱 부족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을창조했고, 진정한 의미에서 국가라는 의미를 가진 민족이었다. 아카디안 (기원전
2,350)부터 후기 앗시리아 왕국 (기원전 8세기)까지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의 상업 및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 서 아나톨리아와 중부
아나톨리아 문화에 있어서 트로이 제 2기 문화적 교류는 주목할 만하다. 하틱 문화의 일부인 트로이의 도시는 모두 10기 (기원전
2,200~1,800)까지 있었으며, 이후부터 하틱문화는 사양길을 걷기 시작하며 결국에는 히타이트 민족에 의해 멸망했다. 이 때부터 아나톨리아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카네쉬(큘테페)와 몇 개의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앗시리아 무역 식민지는 소아시에 있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확장이었다.
히타이트 (기원전
18세기~12세기)
히타이트의 고대 왕국은 허약하고 지방분권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후에
하나로 통일된 뛰어난 중앙조직을 갖춘 히타이트 제국을 건설했고, 수도는 하투샤 (보아즈쾨이)였다. 기원전 15~14세기에 히타이트민족은 소아시아
지역에 산재해 있던 후리안족 미타니 제국, 폰틱 지역에 있던 야만족인 케스카스를 정복하면서 서쪽으로는 마르마라 해까지,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그들은 기원전 1,285년 카데쉬에서 세계 역사상 최초의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은 람세스 2세의 통치하에
있던 이집트와 한 것으로써 이시리아의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히타이트 역사의 말기는 중앙정보의 분산 형태를 뛴다.그 결과로써 구성된
도시 국가들은 기원전 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아나톨리아의 역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히타이트 문명의 유적지들은 아직도 하투샤,
야즐르카야, 알라자회육, 말라티아, 카르카미쉬, 삭크자교쥬, 진지를리, 카라태페등의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어며, 이런 유적지들에서 대단히 수준
높은 각종 예술품과 건축 문화를 볼 수 있다.
바다와 섬사람들의 도착 (기원전
12세기)
기원전 12세기부터 소위 "바다 사람들"이라고 불리던 호전적인 부족들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를 비롯한 동부 전 지역에 대단한 불안을 초래했다. 그리스의 아케아 인들, 렐레지아 인들,
이오니아 인들, 아에올리아인들 , 도리아 인들,크레테 섬의 미노아 인들과 미케네 인들이 바위가 많고 척박한 에게의 섬과 그리스 본토에서
아나톨리아의 비옥한 평야와 계곡을 찾아서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흑해로부터 와서 다르다넬즈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이때마다. 그들은
트로이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들은 이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해 트로이와 전쟁을 하여 이겼고 해협을 통과했다. 호머는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신들, 여신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아름다운 헬렌과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트로이 전쟁의 원래
이유는 상업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넘어온 민족들은 토착민과 동화되어 훌륭한 문명을 발생시켰다. 아나톨리아 전역에서 행해졌던 모신(키벨레,
쿠바바)에 대한 숭배는 새로이 넘어온 부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이오니아에서는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카리아에서는 아프로디테
여신에 대한 숭배는 제우스신을 숭배하는 것을 능가했다. 이 후의 성모마리아에 대한 믿음을 모신(母神) 숭배의 확대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나톨리아 거주민들은 새로이 넘어온 부족들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이 것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문화와 동화되어 놀라운 통합을
이루었다. 탈레스, 디오제네스, 스트라본과 같은 헬레니즘 문화가 소아시아에서 최 정점에 달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철학, 수학,
지질한 천문학, 회화, 조각, 모자이크, 세라믹,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최고 수준의 과학과 순수예술은 새로이 넘어온 부족들과 동화되어 만들어진
것들이다.
페르시아 침입
(기원전 5세기)
기원전 7세기 말에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던 메테스틑 앗 시리아
왕국을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들도 얼마 못 가서 아케메니드에서 온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졋다. 기원전
5세기초는 페르시아 침입을 꼽을 수 있다. 크리루스와 제르제스 황제의 통치 하에서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전역을 침입하는 과정에서 마라톤,
셀라미스, 크리고 플라태아에서 있었던 일련의 전투에서 패배를 햇을지라도 그들은 기원전 4 세기 후반까지 아나톨리아를 통치했다.
헬레니즘 시대 (BC
334~30)
기원전4세기 알렉산더 앞에 굴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 이오니아와
아에올리아를 통치하던 페르가몬 왕국(기원전 283~133)이 강력한 그리스의 영향 하에서 고도의 문명을 창조하면서 히에라폴리스와 아탈레이아와
같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를 건설했다. 미트리다테스와 비티니아의 폰틱왕궁은 동양의 영향을 받아 추천의 훌륭한 예술품을 창조했다. 예술과
과학의 지대한 진보가 헬레니즘 시대에 성취되었다. 고대의훌륭한 건축과 도시계획자들은 수준 높은 주지주의(主知主義)를 더욱 더 고차원으로
만들었다. 이오니아의 건축학교는 뛰어난 신전들, 프리네의 아데나 신전, 디디마의 아폴로 신전 등을 만들었고, 대단히 잘 계획단 도시들인 프리네,
밀레투스, 테오스, 그리고 마그네시아 등을 건설했다.
에페수스와 페프가몬은 이들중의 최 정상이다. 양피지의 발명으로 페르가몬은 당시의 가장 중요한교율 중심지 중의 하나로써 20만권의
필사본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다.
로마시대
페르가몬 왕국의 왕 아탈로스 3세의 유언에
따라 페르가몬은 기원전 133년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소아시아에 대한 로마통치에 저항하던 미트리다테스의 폰틱 왕을 페배시키면서 로마는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그들의 경계를 넓혔다. 그들은 이코니움 (콘냐), 캐사레아 (카아세리), 세바스테아 (시바스)같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고,
동시에 에페수스, 밀레투스, 포카이아, 타르수스, 필라텔피아, 트랄레스, 아소스같은 기존의 도시들을 재정리했다. 팜필리안과 리시아 도시,
페르게,시데, 아스펜도스, 카우노스, 안티펠로스, 미라, 그리고 텔메소스는 이 때 그들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한때는 동부 아시아에서 콤마제네
왕국이 있었는데 기원전 69~34년까지 통치했던 안티오쿠스 왕은 넴루트 산에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고분지를 만들었고 그 곳에 그의 거대한
왕능을 세웠다.
기독교와 비잔틴 제국
아나톨리아는 기독교와 관련하여 항상 신성한 장소였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했고, 선지자 아브라함이 에데사(우르파)와 하란에서
살았으며 성 바울은 타르수스에서 태어나 아나톨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연설을 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안티옥에 있는 성
베드로의 동굴교회에 쓰여져 있던 "크리스트안"이란 이름을 받아 들여 그 후부터 이 이름을 사용했다. 복음 전도자인 사도 요한은 에페수스에서 그의
복음서를 썼고, 성모 마리아는 말년을 그 곳에서 보냈다. 또한 성서의 초대 7대교회가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다. 초기의 종교회의가
니케아 (이즈닉),에페수스,콘스탄티노플(이스탈불), 찰케돈 (카드쾨이) 같은 소아시아의 주요한 도시에서 열렸다. 4세기 초반에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의 행정 수도를 동부로 옮겼다. 이전의 비잔틴움은 콘스탄틴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재 명명되었고 거대한 제국의 수도로써 위대한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기독교가 국교로써 인정되었다. 콘스탄티노플과 많은 다른 아나톨리아에 있던 도시들이 복고 되었고 뛰어난 기념비로
장식되었다.
제국의 다양한 역사는 항상 흥미있는 연구 과제로 여겨져 왔다. 비잔틴 통치 하에서 아나톨리아는 끊임없는
전쟁과 십자군 전쟁의 무대였다. 제국은 7세기에는 아랍의 침입을, 11세기에는 페체넥의 침입을 격퇴시켰으나 13세기에 있었던 라틴군의 침입은
막지를 못했다. 101년에 있었던 로마누스 디오제네스 황제가 이끌던 군대가 셀축 터키에 의해 패배를 당하면서 제국은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막을 내리면서 완전히 끝이 났다
셀축, 오토만, 그리고 터키 공화국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심각한 가뭄 때문에 피폐화 된 고향을 버리고 몇 개의 유목 민족인 터키 부족들이 동쪽으로부터 새로운 땅을 찾아 파도처럼 몰려
들어왔다. 아나톨리아의 광대하고 비옥한 땅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토착민과 유목민족의 가장 매력적인 문화가 통합되는 것을 본 증인이 되었다.
터키의 유목민족들은 소아시아에 가장 위대한 2개의 제국을 창조했다.
그 때 부터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던 거대한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다. 이둘 두 제국은 뛰어난 아나톨리아의 예술 및
건축양식을 받아 들였다. 아나톨리아 셀축은 소아시아를 지배했던 가장 초기의 터키인들이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착민들의 종교를 결코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부족들 간의 평화를 지향했고, 고도의 사회를 창조했으며, 엄격한 봉건 제도 및 시민 분쟁을 종결시켰다. 오토만들은
내무 평화와 형제애의 관심을 쏟았으며 때문에 독특하고 다향한 문화가 수세기 동안 지속될 수 있엇다. 아나톨리아는 터키족이 오기 전까지도 비단길,
마르코 폴로의 여정과 같은 중요한 교역로였다. 비잔틴 제국이 사양길에 접어 들면서 계속되는 무정부 상태와 불안정한 행정은 무역로에서의 상업활동도
침체시켰다.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셀축 터키는 소아시아 전역에 대상 여관인 카라반 사라이를 세웠고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제공해 주었다.
오토만 터키인들은 독특한 농경문화를 창조했으며, 전통적인 유목민의 생활은 도시의 생활로 대체되었다. 오토만의 건축 양식은 이스탈불과 많은 다른
아나톨리아 도시에 산재해 있는 수 많은 사원과 목욕탕, 신학교, 도서관, 다리 등을 볼 때 최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오토만 제국은 세계 제
1차 대전 말에 붕괴되었고, 전설적인 터키의 독립전쟁후인 1922년에 터키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슬람 국가 중에서 유일한 민주국가이며 국교가
없는 터키는 안정된 외교 정책 및 1923년 이래로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인하여 서부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이 것은 유럽공동체와
맺은 관세 동맹 조약에 확실히 명시 되어 있다.